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칼 12세 (문단 편집) ==== 암살? ==== ||[[파일:external/upload.wikimedia.org/CharlesXIIAutopsy1916.jpg|width=200]]||||[[파일:Carl_XII_of_Sweden_grave_2007.jpg|width=200]]|| ||1917년에 마지막으로 부검된 칼 12세의 시신.||||[[스톡홀름]]의 리다르홀름 교회에 있는 칼 12세의 석관.|| 칼 12세의 죽음에 대한 견해는 두 가지가 있다. 하나는 적의 저격수가 발사한 머스킷 탄이나 요새에서 발사한 포도탄에 맞아 죽었다는 것이다. 칼 12세가 사망한 참호의 주변은 요새에서 쏜 총탄과 포탄에 희생자가 많이 나던 곳이었고, 그의 모자에 난 구멍이나 머리의 상처는 느린 탄속이 발사된 포도탄이 만드는 것들과 유사하다. 다른 하나는 암살당했다는 것이다.[* 대표적으로 [[http://www.reenactor.ru/ARH/PDF/Nordling.pdf|Carl. o. Nordling의 논문]]이 있다.] 왕이 너무 갑작스럽게 사망했기 때문에 암살설은 사망 당시부터 꾸준히 있었으며, 이 단락 도입부의 사진을 보면, 관자놀이의 구멍이 너무 커서 사인이 유탄이 아니라 머스킷으로 관자놀이에 쏜 초근접 사격으로도 보인다.[* 당시 쓰던 머스킷볼은 지금 총탄보다 구경이 더 크다. 최소 9mm부터 12~13mm까지 정도.] 또한 시신은 발견 당시 참호에서 엎드린 채로 [[https://commons.wikimedia.org/wiki/File:Fredriksten4159.JPG|발견되었는데]], 시신은 요새를 정면으로 바라보고 있었지만 총상은 가로로 났다는 점도 이상하다고 부각되었다. 게다가 그의 주변에 여러 사람들이 있었지만, 어두워서 아무도 왕이 죽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고 한다. 나아가 한 병사가 칼 12세의 시신에서 황동 단추로 만든 총알[* 당시 스웨덴에서는 왕은 대부분의 총알에는 무적이지만, 왕의 재킷에 달린 황동 단추로 만든 총알에는 죽는다는 미신이 있었다.]을 수거해서 보관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, 후대에 발견된 그 총알을 검사해보니 혈흔이 묻어 있었다. [[DNA 검사]] 결과 혈흔의 DNA는 칼 12세의 DNA와 일치하는 것으로 드러났지만, 양이 너무 적어서 명확한 결론을 내긴 힘들었다. 여하간 이런 결과로 한때 암살설이 유력해보였지만 2005년에 Peter From은 황동 단추 전설은 터무니없다고 반박하는 등 사안은 여전히 논쟁 중에 있다. 정말로 암살당했다면 용의선상은 크게 둘로 나뉜다. 하나는 전쟁에 지칠대로 지쳤을 칼 12세의 부하들이다. 1716년 이후에는 전쟁의 대세가 기울었음에도 불구하고 칼 12세는 휴전을 거부하고 전쟁을 강행했기에, 스웨덴 국민들은 전쟁에 염증을 내며 모두 왕이 미쳤다고 생각하는 상황이었다. 다른 하나는 왕권에 가까웠던 귀족들이다. 칼 12세는 미혼이라 계승자가 없었기에, 처남인 [[프레드리크 1세]], 혹은 사촌 팔츠츠바이브뤼켄 궁정백 등의 잠재적 계승자들이 왕위를 노리고 암살을 사주했을 가능성이 있다. 1917년까지 세 번이나 부검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명확한 결론이 나지 않았고, 지금도 스웨덴 역사학계와 서양 역사학계에서는 칼 12세의 죽음이 암살인가 전사인가 하는 논쟁이 꾸준히 있다. 2022년에도 탄도 실험과 왕의 두개골에 납흔이 없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[[포도탄]]에 저격당했다는 [[https://academic.oup.com/pnasnexus/article/1/5/pgac234/6758520?login=false|설]]이 나왔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